불평하는 백성에게 주신 양식(출16: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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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나님은 이번에도 양식이 없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징계하시지 않고 메추라기(고기)와 만나(mana)를 공급해 주셨습니다.(13-18절) 하나님의 도우심을 그만큼 받았으면 이제 불평은 그만하고 기도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과거에 받은 은혜와 미래에 준비된 축복을 생각하며 오늘의 어려움만 보고 불평하는 불신앙적인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육적인 삶은 물론 영적인 삶도 매우 중요시하고 있음을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육일동안 매일 그날그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셨으나 6일째는 이틀간의 양식을 모아 7일째 되는 안식일(오늘의 주일)은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진정한 “주”로 섬기면서 그 날을 거룩되게 지키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23-26절)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육의 양식만 걱정하고 욕심을 부려 제7일에도 거두려 나갔다가 허탕 친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일렀으나 너무 욕심껏 모아다가 다 먹지 못하고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므로 모세가 화를 냈다고 했습니다.(20절)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오늘의 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헛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들이 제발 주일날만은 육에 너무 치우치지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영의 양식을 공급받아야 할 것입니다.(요4:23)
1. 하나님의 긍휼하심
사람 같으면 감사는커녕 툭하면 불평만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뒤통수라도 쥐어박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연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죽 배가 고프면 그렇겠는가?”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안쓰럽게 생각하셨던 같습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분의 일도 모릅니다.(롬2:4절 참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성을 다시 한번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하나님은 자연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연의 지배를 받거나 동등한 위치 정도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주인이시지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연을 지배하시는 분이시지 자연 법칙에 속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유 없이 쉽게 자연 법칙을 변화시키거나 중단시키지는 않으시지만 분명 지배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예외적인 환경을 만들어 내십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행 할 수 없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식량이 없어 쩔쩔 매는 2백만의 인구를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기적에 의한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자연을 활용하여 크게 역사하십니다
홍해를 가르신 것도 동풍을 이용하신 것처럼 메추라기나 만나를 주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중 그맘때쯤 메추라기들이 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쪽으로 이동한답니다. 하나님은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하는 그들에게 메추라리기가 떼로 몰려와 떨어져 모래에 머리가 박히게 하여 냄새가 날 정도로 실컷 먹게 하셨습니다. 메추라기는 홍해를 건너서 지치면 사막에 와서 지쳐 쉬는 정도가 아니라 떨어졌다고 합니다. 또 만나는 나무위에 이슬이 내려 아교질의 침전물이 생기는데 벌꿀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양이 생겨서 그 수가 먹고 남겠습니까? 그러한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하나님은 “갓씨 같은”(미11:7) 만나를 풍성히 내려 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확립된 자연 질서를 무시하지 않으시면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긍휼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할 것을 아시고 적절하게 공급해 주심을 믿고 감사합시다.
2. 육신의 양식인 만나
그들의 육신의 양식으로 주신 만나를 보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출16:15절)고 했습니다. 그것은 분명 불평할 정도로 딱한 그들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육의 양식으로 주신 음식이었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의 50억이 넘는 인구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생을 스스로 영위하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그 양식이 어떻게 오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응답의 댓가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햇빛에 녹아 없어질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떡)가 지면에 쫙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돈 한 푼 안 내고 모아다 먹었습니다. 지금도 부지런만 하면, 해뜨기 전에만 서둘면 기갈은 없습니다.(시104:21-28) 찾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게을러서 못 먹는 것뿐입니다.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께 구하고 또 주신 것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해가 비취기 전에 이스라엘은 만나를 모으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또한 노동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했습니다.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게으른 사람은 위험한 부류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세상에 충분히 주셨습니다. 그것을 모으고 관리하고 개발하는 것은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기 관리능력 문제입니다. 썩혀서 버리는 것도 자기 잘못입니다.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것을 골고루 나누어 먹으면 모두가 배불리 먹고 살기에 충분할 만큼 하나님은 매일 만나를 주시고 계십니다. 매일 한 오멜(0.4갈론~0.5갈론)씩이면 충분합니다. 온 인류가 공평히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만 해도 0.5%가 전국의 부의 60%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3. 하늘에서 내린 떡
만나는 어디에서 내린 떡이었습니까?(4절) 분명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했습니다.(요6:31-34) 만나는 분명히 인간의 영혼을 위한 살아있는 떡으로서 그리스도의 상징인 “영적인 양식”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 당시 이스라엘은 주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만나는 그들과 죽음 사이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와 죽음 사이에서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영적인 Mana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에 전 희망을 걸었던 것처럼 이 죄악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희망은 오직 “생명의 떡”인 예수그리스도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행4:12)
(2) 사막에 내린 만나는 초자연적이었던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했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기적에 의하여 구출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먹인 손이 보였습니까? 여호와께서 그들 사이에 개입(介入)하실 때 가능했습니다. 오늘날도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구원 얻고 원수들로부터 구출되려면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육이나 영이나 여호와에게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의문을 갖지 맙시다
또 나 같은 것은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나는 충분히 공급되었고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했습니다.(눅15:17)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요10:10)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풍성합니다. 만나를 모아다 먹으면 되었던 것처럼 누구든지 주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행16:31) 끝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불성실에 관하여 몇 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수고를 아끼려고 많이 모아다가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명령(19절)을 거역하여 다음날까지 사용하려다 썩혀 버렸습니다
2. 안식일에 쉬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반대와 불신의 고의성(故意性)은 수고를 아낄 수 있도록 저장하는 것이요, 쉬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절한 것입니다
3. 죄악의 존재에 대한 공공연한 무관심입니다. 이러한 일은 단지 몇몇 사람에 의하여 행하여 졌으나 그들은 공적인 저주나 여호와의 노하심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죄가 횡행하는데도 슬퍼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단체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육적인 삶은 물론 영적인 삶도 매우 중요시하고 있음을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육일동안 매일 그날그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셨으나 6일째는 이틀간의 양식을 모아 7일째 되는 안식일(오늘의 주일)은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진정한 “주”로 섬기면서 그 날을 거룩되게 지키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23-26절)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육의 양식만 걱정하고 욕심을 부려 제7일에도 거두려 나갔다가 허탕 친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일렀으나 너무 욕심껏 모아다가 다 먹지 못하고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므로 모세가 화를 냈다고 했습니다.(20절)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오늘의 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헛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들이 제발 주일날만은 육에 너무 치우치지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영의 양식을 공급받아야 할 것입니다.(요4:23)
1. 하나님의 긍휼하심
사람 같으면 감사는커녕 툭하면 불평만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뒤통수라도 쥐어박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연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죽 배가 고프면 그렇겠는가?”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안쓰럽게 생각하셨던 같습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분의 일도 모릅니다.(롬2:4절 참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성을 다시 한번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하나님은 자연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연의 지배를 받거나 동등한 위치 정도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주인이시지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연을 지배하시는 분이시지 자연 법칙에 속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유 없이 쉽게 자연 법칙을 변화시키거나 중단시키지는 않으시지만 분명 지배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예외적인 환경을 만들어 내십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행 할 수 없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식량이 없어 쩔쩔 매는 2백만의 인구를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기적에 의한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자연을 활용하여 크게 역사하십니다
홍해를 가르신 것도 동풍을 이용하신 것처럼 메추라기나 만나를 주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중 그맘때쯤 메추라기들이 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쪽으로 이동한답니다. 하나님은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하는 그들에게 메추라리기가 떼로 몰려와 떨어져 모래에 머리가 박히게 하여 냄새가 날 정도로 실컷 먹게 하셨습니다. 메추라기는 홍해를 건너서 지치면 사막에 와서 지쳐 쉬는 정도가 아니라 떨어졌다고 합니다. 또 만나는 나무위에 이슬이 내려 아교질의 침전물이 생기는데 벌꿀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양이 생겨서 그 수가 먹고 남겠습니까? 그러한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하나님은 “갓씨 같은”(미11:7) 만나를 풍성히 내려 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확립된 자연 질서를 무시하지 않으시면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긍휼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할 것을 아시고 적절하게 공급해 주심을 믿고 감사합시다.
2. 육신의 양식인 만나
그들의 육신의 양식으로 주신 만나를 보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출16:15절)고 했습니다. 그것은 분명 불평할 정도로 딱한 그들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육의 양식으로 주신 음식이었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의 50억이 넘는 인구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생을 스스로 영위하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그 양식이 어떻게 오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응답의 댓가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햇빛에 녹아 없어질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떡)가 지면에 쫙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돈 한 푼 안 내고 모아다 먹었습니다. 지금도 부지런만 하면, 해뜨기 전에만 서둘면 기갈은 없습니다.(시104:21-28) 찾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게을러서 못 먹는 것뿐입니다.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께 구하고 또 주신 것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해가 비취기 전에 이스라엘은 만나를 모으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또한 노동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했습니다.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게으른 사람은 위험한 부류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세상에 충분히 주셨습니다. 그것을 모으고 관리하고 개발하는 것은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기 관리능력 문제입니다. 썩혀서 버리는 것도 자기 잘못입니다.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것을 골고루 나누어 먹으면 모두가 배불리 먹고 살기에 충분할 만큼 하나님은 매일 만나를 주시고 계십니다. 매일 한 오멜(0.4갈론~0.5갈론)씩이면 충분합니다. 온 인류가 공평히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만 해도 0.5%가 전국의 부의 60%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3. 하늘에서 내린 떡
만나는 어디에서 내린 떡이었습니까?(4절) 분명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했습니다.(요6:31-34) 만나는 분명히 인간의 영혼을 위한 살아있는 떡으로서 그리스도의 상징인 “영적인 양식”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 당시 이스라엘은 주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만나는 그들과 죽음 사이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와 죽음 사이에서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영적인 Mana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에 전 희망을 걸었던 것처럼 이 죄악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희망은 오직 “생명의 떡”인 예수그리스도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행4:12)
(2) 사막에 내린 만나는 초자연적이었던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했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기적에 의하여 구출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먹인 손이 보였습니까? 여호와께서 그들 사이에 개입(介入)하실 때 가능했습니다. 오늘날도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구원 얻고 원수들로부터 구출되려면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육이나 영이나 여호와에게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의문을 갖지 맙시다
또 나 같은 것은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나는 충분히 공급되었고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했습니다.(눅15:17)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요10:10)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풍성합니다. 만나를 모아다 먹으면 되었던 것처럼 누구든지 주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행16:31) 끝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불성실에 관하여 몇 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수고를 아끼려고 많이 모아다가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명령(19절)을 거역하여 다음날까지 사용하려다 썩혀 버렸습니다
2. 안식일에 쉬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반대와 불신의 고의성(故意性)은 수고를 아낄 수 있도록 저장하는 것이요, 쉬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절한 것입니다
3. 죄악의 존재에 대한 공공연한 무관심입니다. 이러한 일은 단지 몇몇 사람에 의하여 행하여 졌으나 그들은 공적인 저주나 여호와의 노하심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죄가 횡행하는데도 슬퍼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단체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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