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출1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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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에담에서 나오게 하사 남동쪽으로 쓴 호수(Bitter Lake)를 왼편으로 끼고 돌아가다 돌쳐서 남쪽 홍해변을 따라 시내산 쪽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막을 치게 한 바알스본(2절))은 수에즈만(홍해)이 북쪽으로 돌출된 곳으로 앞쪽과 오른쪽은 산이었고 왼쪽은 바다(홍해)였습니다. 그곳은 애굽 경내로 광야로부터 차단되어 애굽의 군대가 추격하면 꼼짝없이 갇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환경은 하나님께서 바로로 하여금 추격을 받도록 유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1.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1-5)
시련은 사람을 정화시킵니다.(약1:3-4)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대부분 시련의 용광로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시므로 더욱 강한 민족이 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자신들은 물론 이방인들에게 확실히 인식시키므로 참 종교로서 강한 인상을 갖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통, 수난, 실망, 인애 등은 우리의 영혼을 강건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증인이 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연단과 시련은 우리의 방법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눈으로가 아니고 스스로 보시기에 적합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홍해를 갈라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항상 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가끔 우리에게 예비 해 주시고 놀라게 하십니다. 바알스본에 장막을 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의도(意圖)는 바로의 군대로 물리치고(14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행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며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분명히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심판의 하나님이시며(사30:18), 우주의 통치자이시며(시135:6) 사람(바로)의 격노까지도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십니다.(시76:10) 이 부분을 통하여 서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격분은 큰 상심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바로의 격분은 결국 자기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2) 오랜 습성도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방되었고 자유를 얻었습니까? 그러나 애굽의 추격을 받자 습성이 나타났습니다. 금방 모세에게 탓했고 절망감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오랜 노예 생활 속에서 정신과 몸에 베인 습성이었습니다. 우리가 바꾸어지려면 세상 교육보다는 다른 힘과 방법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눅·19장)도 예수 만나자 변했지 않습니까?
(3) 하나님은 시련으로 인도하시나 승리의 확신을 주십니다
우리는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와 믿음이 어느 시대이고 필요합니다.(13절)
(4) 사악한 자는 구원받지 못하고 심판 받습니다
바로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체험했으면 이제 그만 회개는 못하더라도 포기를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2. 추격한 바로(6-10절)
인간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면서 애굽인들은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12:33절)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들은 억압당해 고통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자책감은 전혀 없었고 노동력을 잃었다는데 오히려 분한 감정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약속도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내 보낼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볼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스본에 장막을 쳤다는 정보를 듣자 즉각 군대를 동원했고 급히 추격했던 것입니다.
남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아 덫에 걸린 짐승을 잡으려는 사냥꾼 마냥 바로는 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바로의 마음은 완강해져서 이제는 이스라엘을 구출할 신(神도) 없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비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심으로 간단히 처리하십니다.(눅1:51, 비교 사31:3)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때 마귀로부터 추격당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바로가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때로는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공격당하기도 합니다. 악마는 어떠한 영혼도 자신의 손아귀에서 놓아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3. 원망하는 이스라엘 민족(10-14)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신이 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서 좋아하고 안도하기는 일렀습니다. 이제 한숨 돌리는가 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즉 애굽사람들이 바로 자기들 뒤에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10절) 이제 곧 몰아닥쳐 자기들을 마구 짓밟아 버릴 것이 뻔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대항 할 준비가 전혀 없습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공포스러웠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모세의 지팡이 사건도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혹독한 악담을 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 하느냐?" (11절) 그 악담은 모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에게 삿대질을 하는 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심각성은 이해가 가지만 우리들도 믿는다고 하면서 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불신앙적인 언사나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 해 보려거나 신앙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 해 보려는 기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마 오랜 노예생활과 애굽의 우상을 섬기던 타성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불 신앙적 반응이었다고 한발 물러나 이해할 수 있지만 오늘날도 소위 신앙 체험을 많이 하고 기도깨나 했다는 사람들 입이나 행동에서 이런 반응이 나올 때 황당함을 느끼곤 합니다. 물론 나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많이 살펴보아야 할 줄 압니다. 믿음의 사람은 과거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심하게 생각하지 말고 대범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그러한 불 신앙적 행위 앞에서 모세는 어떠했습니까?(13-14절) 우리는 이런 경우에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싸우겠습니까? 우선 자리를 피하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손들고 항복하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꾸짖거나 화내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병거와 군대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介入)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만 바라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누구를 바라보라고 했습니까?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히12:2) 모세는 위경 앞에서도 침착하고 담대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에게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3절) 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의연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구원은 내 힘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엡2:8) 모세는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이 저 모자란 애굽왕 바로의 군대에게 우리를 넘겨주실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못하겠으면 “가만히 서서”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와 세상과의 차이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끄럽습니다. 자기 아니면 안 된다고 악을 씁니다. 그런 때 보면 전부 똑똑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어려운 일이 닥칠수록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애굽을 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섭리인 것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우리는 지혜로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앞을 내다보는 명철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될 대로 되겠지 체념하지 말고, 또 소란도 피우지 말고, 주어진 상황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세처럼 태산 같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됩시다.(사30:15) 60만명의 우려와는 달리 하나님은 한 사람 모세의 믿음대로 역사하셨습니다. 믿음의 위력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1.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1-5)
시련은 사람을 정화시킵니다.(약1:3-4)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대부분 시련의 용광로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시므로 더욱 강한 민족이 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자신들은 물론 이방인들에게 확실히 인식시키므로 참 종교로서 강한 인상을 갖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통, 수난, 실망, 인애 등은 우리의 영혼을 강건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증인이 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연단과 시련은 우리의 방법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눈으로가 아니고 스스로 보시기에 적합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홍해를 갈라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항상 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가끔 우리에게 예비 해 주시고 놀라게 하십니다. 바알스본에 장막을 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의도(意圖)는 바로의 군대로 물리치고(14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행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며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분명히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심판의 하나님이시며(사30:18), 우주의 통치자이시며(시135:6) 사람(바로)의 격노까지도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십니다.(시76:10) 이 부분을 통하여 서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격분은 큰 상심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바로의 격분은 결국 자기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2) 오랜 습성도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방되었고 자유를 얻었습니까? 그러나 애굽의 추격을 받자 습성이 나타났습니다. 금방 모세에게 탓했고 절망감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오랜 노예 생활 속에서 정신과 몸에 베인 습성이었습니다. 우리가 바꾸어지려면 세상 교육보다는 다른 힘과 방법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눅·19장)도 예수 만나자 변했지 않습니까?
(3) 하나님은 시련으로 인도하시나 승리의 확신을 주십니다
우리는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와 믿음이 어느 시대이고 필요합니다.(13절)
(4) 사악한 자는 구원받지 못하고 심판 받습니다
바로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체험했으면 이제 그만 회개는 못하더라도 포기를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2. 추격한 바로(6-10절)
인간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면서 애굽인들은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12:33절)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들은 억압당해 고통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자책감은 전혀 없었고 노동력을 잃었다는데 오히려 분한 감정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약속도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내 보낼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볼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스본에 장막을 쳤다는 정보를 듣자 즉각 군대를 동원했고 급히 추격했던 것입니다.
남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아 덫에 걸린 짐승을 잡으려는 사냥꾼 마냥 바로는 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바로의 마음은 완강해져서 이제는 이스라엘을 구출할 신(神도) 없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비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심으로 간단히 처리하십니다.(눅1:51, 비교 사31:3)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때 마귀로부터 추격당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바로가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때로는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공격당하기도 합니다. 악마는 어떠한 영혼도 자신의 손아귀에서 놓아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3. 원망하는 이스라엘 민족(10-14)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신이 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서 좋아하고 안도하기는 일렀습니다. 이제 한숨 돌리는가 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즉 애굽사람들이 바로 자기들 뒤에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10절) 이제 곧 몰아닥쳐 자기들을 마구 짓밟아 버릴 것이 뻔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대항 할 준비가 전혀 없습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공포스러웠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모세의 지팡이 사건도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혹독한 악담을 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 하느냐?" (11절) 그 악담은 모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에게 삿대질을 하는 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심각성은 이해가 가지만 우리들도 믿는다고 하면서 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불신앙적인 언사나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 해 보려거나 신앙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 해 보려는 기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마 오랜 노예생활과 애굽의 우상을 섬기던 타성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불 신앙적 반응이었다고 한발 물러나 이해할 수 있지만 오늘날도 소위 신앙 체험을 많이 하고 기도깨나 했다는 사람들 입이나 행동에서 이런 반응이 나올 때 황당함을 느끼곤 합니다. 물론 나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많이 살펴보아야 할 줄 압니다. 믿음의 사람은 과거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심하게 생각하지 말고 대범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그러한 불 신앙적 행위 앞에서 모세는 어떠했습니까?(13-14절) 우리는 이런 경우에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싸우겠습니까? 우선 자리를 피하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손들고 항복하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꾸짖거나 화내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병거와 군대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介入)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만 바라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누구를 바라보라고 했습니까?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히12:2) 모세는 위경 앞에서도 침착하고 담대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에게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3절) 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의연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구원은 내 힘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엡2:8) 모세는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이 저 모자란 애굽왕 바로의 군대에게 우리를 넘겨주실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못하겠으면 “가만히 서서”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와 세상과의 차이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끄럽습니다. 자기 아니면 안 된다고 악을 씁니다. 그런 때 보면 전부 똑똑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어려운 일이 닥칠수록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애굽을 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섭리인 것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우리는 지혜로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앞을 내다보는 명철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될 대로 되겠지 체념하지 말고, 또 소란도 피우지 말고, 주어진 상황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세처럼 태산 같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됩시다.(사30:15) 60만명의 우려와는 달리 하나님은 한 사람 모세의 믿음대로 역사하셨습니다. 믿음의 위력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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