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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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순복 작성일 23-06-11 09:17 조회 1,454 댓글 0본문
1. 교회의 본질
1) 교회 -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모임
"로마 캐톨릭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는 교회의 본질의 성질에 관해서 그 의견의 차이를 현저히 보이고 있다. 전자는 교회의 본질을 외부 또는 유형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찾는다. 사실 이 조직체를 엄밀히 살펴보면, 그것은 그들의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전 단체가 아니라, 주교, 대주교, 교황의 최고 고문들, 또는 교황 등의 보다 높은 교권자들의 단체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교훈하는 교회'로서의 이 단체와 '교훈을 받는' 혹은 '설교를 듣는 교회'로서의 신자들의 공동체를 구별지어 놓았다.(중략) 종교개혁은 이러한 교회에 관한 외부적인 개념에 반항하고, 성도들의 내면적 또는 영적 교통에서부터 교회의 본질을 찾았던 것이다."1) 기본적으로,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생각하지, 조직이나 지위에 두지 않는다.
2) 교회는 유형적이면서 또한 무형적이다.
우리가 교회라는 말을 쓸 때에는 별로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라는 말에는 무형성과 유형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꼭 필요하다. 모든 참 신자들의 교제라는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교회는 분명히 무형적(불가시적)이다.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과, 그들이 행하는 모든 신앙적인 행동을 볼 수는 있지만, 그들의 신앙 자체를 볼 수는 없다. 그리고 교회로서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그 모임이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라고 불리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영적인 영역을 가지게 마련이고, 그것은 당연히 불가시적이다.
그러나, 또 교회가 유형적인 모습을 지니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분명 교회이다. 그들 가운데 불신자가 섞여 있을 수 있다고 해서 그 모임을 교회가 아니라고 불러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형적 특성을 무시하는 것 역시 옳은 태도가 아니다.
3) 교회는 보편적이면서 또한 지역적이다.
교회라는 말에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집합을 지칭하는 의미도 들어 있고, 또 어느 한 지역에 존재하며 매 주일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을 지칭하는 의미도 들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것이지만, 또한 어떤 특정한 지역에 존재하는 지역적인 개념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5) 교회와 이스라엘
전통적인 조직신학에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부분이지만, 근래에 들어서 상당히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20세기에 들어 세대주의가 등장하면서, 이 문제가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있어서 세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그 관계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그 내용들을 다 다룰 수는 없겠으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유대인, 예루살렘 등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된다.2)
6)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근래에 복음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하나님 나라"의 문제가 재조명되자 교회론에서 상당히 중요한 논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카톨릭에서는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카톨릭 교회에 소속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 되는 셈이며, 교황권은 곧 하나님의 권세를 대리하는 것이 된다. 또, 세대주의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는 별 관계가 없는 미래의 사건이 뿐인 것이 된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설교한 적은 있으나 교회가 가까웠다고 설교하지는 않았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인 것으로 교회에 의해서 실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으나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3)
2. 교회의 표식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세례와 성찬)가 바르게 집행되며,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는 것,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이미 그 모임을 교회라고 지칭할 수는 없게 된다.
또, 어느 모임에서 전도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성례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그 모임을 교회라고 부를 수는 없다.
4. 교회의 정치
교회의 정치에는 감독정치, 회중정치, 장로교정치가 있고, 이외에도 국가교회 형태, 교황정치, 조합교회 등의 형태가 존재한다.
장로교회 정치제도의 근본 원리를 제시해 본다. 첫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위의 원천이시다.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둘째, 그리스도는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그 권위를 행사하신다. 말씀에 근거하지 아니한 권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왕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에게 권세를 주신다. 이는 교회의 직원(직분자)들이 권세를 갖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목사, 장로, 집사 등의 모든 직분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권세를 나누어 갖게 된다. 넷째, 다스리는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에 있다. 이는 교권의 단위는 지교회(당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지교회는 그 다스림에 있어서 독립적이고, 자유를 갖는다.
5. 교회의 권세
교회의 권세란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교회가 하는 일, 즉 교회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 교회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교회의 권세는 영적인 것이며, 사역적인 것이다. 이 말은 교회의 권세가 세속 정치권력과 같이 물리적 강제력을 발휘하는 형태를 취할 수 없다는 말이며, 또한 위에서 군림하는 권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권세라는 말이다.
교회의 권세에는 주로 교리권(교훈권), 치리권, 봉사권을 둔다. 곧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의 질서와 순결을 유지하며, 교회에 속해 있거나 또는 속하지 아니한 사람들, 또는 사회에 봉사하는 권세라는 말이며, 이는 또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규정하고 있다. 가르치고, 다스리고, 봉사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인 셈이다.
제2부 은혜의 수단
"은혜의 수단"이라고 말하면 주로 말씀, 성례(세례와 성찬), 기도를 든다. 어떤 경우에는 말씀과 성례만을 말하기도 한다. 독특하게도, Wayne Grudem은 1. 말씀의 선포, 2. 세례, 3. 성찬, 4. 서로를 위한 기도, 5. 예배, 6. 교회 권징 7. 구제, 8. 영적 은사들, 9. 친교, 10. 전도, 11. 개인을 향한 사역 등을 모두 은혜의 수단들이라고 부르고 있다.6)
1. 말씀
1)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
말씀은 은혜의 수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설교되는 것에 중점을 두어서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른 방법으로도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또는 대화와 문학을 수단으로 하여 소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성례는 교회에서 합법적인 교직자에 의해서만 집행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신자들에 의하여 세계에 전달될 수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역사되는 것이다."7)
2)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
말씀의 역사에 대해서 두 가지 양극단이 있다. 하나는 말씀의 지적이며 도덕적 역사만으로도 새 생명을 산출해 내는 데 충분하다는 입장이고, 하나는 성령의 역사에만 모든 것을 기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구원론에서 다루었듯이, 성령은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하신다.
3) 율법과 복음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을 논할 때, 율법과 복음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Berkhof도 이 구분을 따른다.8) 그러나, 성경의 내용을 율법과 복음으로 나누는 것은 그리 적절한 분류가 되지 못한다. 특히 구약신학이 발달하면서, 구약에 기록된 율법의 내용들은 결코 이전에 "복음"이라고 따로 떼어서 불렀던 것과 다른 것이 아님이 드러나고 있다. 둘 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음으로 인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모두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2. 성례
개혁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성례에 포함시키지만, 카톨릭에서는 7성례를 주장한다. 즉 세례, 성찬, 견진, 고해, 안수(임직), 혼인, 종부이다. 개혁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제외한 성례들이 성경적인 근거가 없음을 들어 이들 성례들을 거부한다.
1) 세례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예식이다. 세례의 문제를 논할 때에, 주로 다루어지는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옳은가, 누가 베풀어야 하는가, 누가 받아야 하는가이다.
세례의 방식에 있어서, 침례파의 경우는 침수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막 10:38-39, 눅 12:50, 롬 6:3-4, 골 2:12에 그 근거가 있다. 이에 비해서, 세례가 영적 성결, 혹은 정화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머리에 물을 붓는 방식이 옳다는 입장도 있다. 즉, 구약의 제사장들에게 피나 물을 뿌려 거룩하게 하였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그 방식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는 것을 그리 지혜로운 일이 못된다. 분명한 것은, 역사적으로 두 방식이 함께 공존해 왔다는 것이고, 침수보다는 물을 뿌리거나 붓는 형식이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세례를 베푸는 사람은 언제나 합법적으로 세워진 교직자이다. 왜냐하면 말씀과 성례의 집행은 동일집권에 속하기 때문에, 복음의 사역자만이 세례의 합법적인 시행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카톨릭은 세례를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로 본다. 그렇기에, 오히려 카톨릭에서 사제들이 아닌 이외의 사람들도 세례를 베풀 수 있다는 가르침이 나타난다.
세례는 그 받는 사람의 믿음을 전제한다. 그렇기에, "세례를 받는 사람의 믿음과 상관없이 은혜가 임한다는 카톨릭의 가르침은 피해야 한다."9) 그러면서도 우리는 유아세례를 인정하는 입장에 서 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맺어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특성에 근거한 것이다. 할례는 난지 8일만에 주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언약, 즉 새 언약 역시 하나님과의 언약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언약의 틀이 그대로 전수되어 내려온다고 보는 것이다.
2) 성찬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정하신 법이다. 이 역시 은혜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는데, 세례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그 예식에 참석하는 자의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세례를 받은 자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성찬에 대해서 다룰 때, 주로 화체설, 공재설, 기념설, 성령임재설의 문제가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우리는 칼빈의 입장을 따라 성령임재설을 받는다. 이는 물론 그 참여자의 믿음에 관계없이 성령께서 임재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 예식에 성령의 역사가 있고, 그로 인하여 성도들이 은혜를 체험한다는 사실을 밝힐 뿐이다.
3) 기도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기도를 말할 때, 예배에서 대표로 기도하는 것을 그 중심에 둔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도와 함께 기도하는 것이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기도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는 수단이다. "만일 교회에서의 기도가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은 입술만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신실한 믿음의 참된 표현이라면, 성령께서 그를 통하여 큰 축복을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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