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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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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619회 작성일 21-07-1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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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20:1-5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거룩한 샘' 이라는 곳에 이르렀지만 막상 물이 없자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광야의 길은 어떤 면에서 이집트의 노예생활보다 더 힘든 곳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노예였지만 먹을 양식과 마실 물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광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에대한 장기적인 보장없이 하루하루 노심초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쯤되면 정말 뭣하러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로 나왔는지 후회할 만 합니다.

그러나 광야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우연이 아니라 운명입니다.
그대로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는 시간문제일 뿐 언젠가는 물도 피도 다 빨리고 죽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나쁜 곳이라 부르고 이집트를 그리워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통적인 생각이 하나 있음을 알게됩니다.

바로 "나만 아니면 돼" 라는 생각입니다.
다른 말로는 "나만 잘되면 돼"라는 생각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지라도 운만 좋으면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이집트 감독관들에게 인정받으면 기록원이 되어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지라도 운만 좋으면 포도도 얻어 먹을 수 있고 석류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오니 부자든 가난하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지 모두가 같은 것을 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와 때때로 주시는 메추라기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물이 많은 곳으로 가면 모두가 배터지게 물을 마셨고, 메마른 곳으로 가면 모두가 목이 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집트에서 잘나가던 기록원 출신 소위 고학력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가 더욱 싫었습니다.
광야가 모든 백성들의 삶의 수준을 '만나와 메추라기' 로 표현되는 한가지로 평준화 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고아와 과부, 노약자들은 상대적으로 행복했습니다.
광야에서는 적어도 약하고 무능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굶어 죽은 사람, 목말라 죽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길이라는 은유의 대상인 믿음의 길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믿는 성도들일지라도 어떤 이들은 부유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빈곤할 것입니다.
부유한 성도들은 빈곤한 자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나누며 빈곤한 이들은 자신들보다 더 빈곤한 자들에게 자신의 몴을 나누는 삶이 믿음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음으로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본문의 포도와 석류는 물처럼 생존에 필요한 필수 요소가 아닙니다.
있어도 되고 없으면 아쉽긴해도 문제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 성도는 자신의 사치보다 타인의 빈곤을 더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길은 가진 자들의 것을 거두어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복지체계로 여길 수 있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국가나 기관이 주도하는 복지체계는 세금이라는 강제적 수단을 통해서 부의 불균형과 분배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에 반해 믿음의 길은 전혀 다릅니다.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잘되면 돼' 라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특히 공동체 안의 약한 자들을 위해 나를 버리고 심지어 나를 죽이는 마음이라는 근본적인 출발선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근본 정신이 그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유함의 정도와 소득의 정도에 상관없이 교회의 성도들은 검소한 삶과 선한 기부라는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노력여하에 따라 게으르고 무능력한 자들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공정한 경쟁이고 정의라고 주장합니다.
성경말씀대로 많이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에게 나누어야 한다면 누가 굳이 일하겠느냐 그냥 다들 놀고 먹다가 그리이스 처럼 재정 파탄에 이를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다른 사람들이 게으름 피울 것이라는 생각에 나도 일하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유' 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피말리는 경쟁의 장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자본' 이라는 이름으로 경쟁에서 이긴 자가 더욱 유리하도록 운동장을 기울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세상과 달랐습니다.
개인의 능력의 개발과 노력의 동기는 자신의 위함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함 특히 약한 자들을 위함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이 말하는 공정과 정의와 반대됩니다.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이 세상의 정의인 것에 반해 나를 위함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함은 하나님의 정의인 것입니다.
이는 사람을 믿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인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어도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함이 곧 나를 위함이라는 공동체 중심 사상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을 가르치시기위해 40년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나' 중심의 생각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사람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사람을 믿지 못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변화받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모세는 그들과 얼마나 달랐을까요?


6-13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40년을 광야에서 훈련받았어도 변한 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각하긴 합니다만 실상 모세도 별로 변한 게 없어보입니다.

본문의 모세는 하나님께 두 번 놀랐습니다.

모세의 생각에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하나님께서는 벌대신 반석을 통해 물을 주시겠다고 하자 '이건 뭐지' 하고 놀랐습니다.

아직도 원망하는 버릇을 못 고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을 받아도 신통치 않을텐데 물까지 주시면 앞으로 계속 조금만 목말라도 그 때마다 원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내가 미쳤다고 니들한테 물을 주랴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쳤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반석에게 말로 명령하라고 하셨지만 모세는 '내가 니들한테 뭐하러 물을 줘' 라며 반석을 부서져라 두 번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반석으로부터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성인으로 추앙받던 모세지만 그 역시 자신만의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습니다.

특히 믿음 좋다라는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영적인 능력주의' '영적 엘리트주의'의 함정에 빠졌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의 형이 빠졌던 '영적 개인주의' 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모세를 놀라게하시고 그 대신 물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다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믿는 성도들의 생각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르다'는 것을 '거룩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평소 '거룩함'을 자주 말하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거룩함은 '다르다' '구별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뭔가 다르게' 만드시려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나' 중심의 생각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같은 사람도 '영적인 나 중심' 의 우물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갈라진 반석을 통해 물을 내어주시고 모세의 생각을 바꿔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듯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옷만 거룩해서도 말만 거룩해서도 행동만 거룩해서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짜 거룩하려면 하나님처럼 사람들의 생각과 '확' '달라야' 합니다.

심지어 교회 내의 믿음 좋은 사람들과도 '확' 달라야 합니다.

노력한 만큼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러다 누가 일하겠는가 다 게을러 질 거다라는 생각으로부터 달라져야합니다.
설마 이런 죄인도 용서받겠나라는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러면 다 죄짓지 뭐하러 선하게 살겠냐라는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나' 중심의 생각이지 '하나님' 중심의 생각이 아닙니다.

'나 중심'의 생각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있다는 '공동체' 중심의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놀라고 사람들이 놀라게 됩니다.

뭔가 다르긴 다르다라는 반응이 나와야 진짜 거룩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달라지는 것, 거룩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심지어 모세도 40년 광야 훈련을 거치고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12절에서 그 이유를 '믿지 아니하고'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저절로 '나'를 믿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움켜쥐는 대신 공동체를 위해 나누려면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오직 믿음' 뿐입니다.

이런 죄인도 용납해야 하는가 라는 의심 대신 이런 죄인도 변화시키시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나와 다릅니다. 아니 사람들의 생각을 언제나 무너뜨리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우리도 뭔가 달라도 확 달라야 합니다.

상식선에서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용납하고 적당히 희생하는 정도로는 확 다를 수 없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선량한 사람들과 믿음의 성도들 사이에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목숨을 걸고 믿읍시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착하디 착해도 이 정도로 착할 줄이야' 라고 놀랄 정도로 착하고 선해야 합니다.

착해 빠져서 이용당할 것 같아 불안할 지라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더 착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각박하고 살벌해진 이유는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악해져서가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적당히 착해서 입니다.

제대로 착한 성도 다섯 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 같은 도시 두 개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목숨걸고 정직하고 희생하고 봉사하고 충성스럽고 성실합시다.

요즘 세상 사람들과는 확 다르게 살아봅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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