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계신 주님
페이지 정보
본문
흔히들 4월은 잔인한 달이요, 5월은 신록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왜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까? 죄인들이 구세주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기독교에서는 부활의 달이요, 소망의 달이요, 생명의 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속량의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상에 며칠이나 더 머무시다가 승천하셨습니까? (40일) 부활주일이 지난 8일이었으니까 지금은 지상에 머무신 기간입니다. 그 주님께서 바로 여러분 앞에, 여러분 가운데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는 여러 차례 걸쳐 막달라 마리아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주목할 점은 나타나실 때마다 주님이 서셨던 위치를 성경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여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주님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 거기에 가서 주님을 만나라”(마28:7)고 했습니다. 여기서 부활의 주님은 우리보다 “앞서가시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은 항상 우리의 앞장을 서시는 인도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은 날이 밝을 때 바닷가에 서 계셨다고 했습니다.(요21:4) 제자들이 노를 저어 부두에 도착했을 때 주님은 벌써 건너편에 와 계셨습니다. 또 제자들이 골방에 숨어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가운데 서 계셨다고 했습니다.(요20:19)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 해 주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앞에 계시고, 벌써 건너편에 와 계시고, 우리 가운데 계시는 행동하시는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평안케 하시는 주님,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은 내 앞에 계십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는 대중 앞에서 처음 설교를 하면서 시편16편을 인용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 내용이 본문 사도행전 2:22-29절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다윗임금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25절)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웠음이여.....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베드로는 주님이 자기 옆에 계시며, 자기 우편에 계시므로 요동치 않는 생활을 하며 마음이 기쁘고 육체는 희망에 넘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내 뒤에 젖혀 놓을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모실 때 요동치 않고 기쁨에 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밤길을 갈 때도 내가 앞서면 귀신이 금방 끌어당기는 것 같고 얼마나 몸이 오싹 오싹 무서운 기가 드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앞세우고 그 위에 따라가면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나를 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주님을 앞장세울 때 기쁨이 넘치고 소망이 싹틉니다. 우리는 부활절이 지나 가버렸다고 부활하신 주님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역사(歷史)속에 파묻혀 버리면 안 됩니다. 오늘도 내일의 빛으로 주님을 내 앞에 모셔야 합니다. 내 뜻에 주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내 앞에 모시고 따라갈 때 안전하고 기쁘고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안에 사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살며 이웃 안에 사는 자를 뜻한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이웃 안에 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루터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 자유와 기쁨은 예수를 내 뒤에 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 즉 모든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주님을 앞장세우는 것이 그 근본적 태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연주자는 자기를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곡을 만든 작곡가의 뜻을 최대한도록 잘 해석하고 표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북을 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북을 치는 사람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을 내 앞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성전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뒷세우고 왔기에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사흘이나 헛고생 했듯이 우리 크리스챤들이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교회는 출석하나 예수님을 뒷세우고 살면 얼마든지 헛수고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을 기독교인에 대한 결정적인 정의로 주장했습니다. 사영리에 보면 의자의 주인인 주님을 밀어내 버리고 자기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폴틸리는 진정한 신앙이란 “moving outside myself" (자기의 상자 밖으로 나가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삶이 곧 예수님 중심의 삶이요, 예수님을 내 앞에 모시는 구체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2. 주님은 벌써 건너편에 와 계셨습니다
다시 고기잡이로 나섰다는 제자들의 모습은 허망하고 비참한 인간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참혹한 처형을 바로 며칠 전에 목격한 그들에게는 불안과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은 그들에게 당황과 회의를 품게 했습니다. 낡은 옛 직업인 고기잡이로 3년 만에 돌아온 그들은 그 동안에 잠시나마 품었던 꿈과 이상이 붕괴되고 허무한 옛 모습을 발견한 좌절 속에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밤새도록 고기가 한 마리도 안 잡혔다는 현실은 그들을 우울하게 하고 짜증나게 하였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빈 배속에 올라앉아 아침을 맞이하는 상황은 한마디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때 바로 눈앞에 바다가 언덕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실패를 거듭한 베드로가 자기를 파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막연한 예수, 죽은 예수, 부활했다는 소문의 예수, 남들의 예수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 바로 눈앞에 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 이미 건너편에 미리 와 계신 주님은 소망과 해결과 구원자로서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체험을 설교로 외친 것입니다. “나를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내 우편에 계시도다”(25절) 성경에서 우편이란 우리를 지켜 주시는 구원이신 하나님을 가리킬 때의 위치입니다. 옛날 무사는 방패를 왼손에 잡았기 때문에 좌편은 방어가 잘 되었지만 적의 공격에 위험하고 약한 곳이 오른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오른편에 계신다고 하는 말씀은 우리의 약점과 부족한 점과 허물과 단점을 보충하시며 나의 약함을 지켜주시는 주님을 뜻합니다. 약점과 죄를 뻔히 보시며 나를 문제의 수렁에서 인도해 내시기 위하여 대기하고 계시는 주님을 말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너무나 먼 다리」「가장 길었던 날」등 대작을 쓴 문학가 코넬리어스 라이안 (cornelus ryan)은 5년간 암과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그 투병 기록을 부인이 책으로 엮은 것이 「가장 긴밤」(The longest night)인데 그녀는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남편은 아침마다 일어나면 똑 같은 기도를 반복했습니다. 하나님 또 하루 좋은 날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는 짧은 기도였습니다.
남편은 자기가 암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었을 터인데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때 남편은 평소에 생각 해 두었던 기쁨의 다섯 가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①아내를 또 볼 수 있기 때문이요 ②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요 ③병들어 눕기 전에 가장 길었던 날을 탈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요
④병과 싸울 의지의 힘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⑤주님은 언제나 자기 곁에(침상곁)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랍니다.
과연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으나 살아계신 예수,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의 건너편, 고통의 건너편에 서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테반은 돌에 맞아 순교 당하면서도 저 건너편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주님을 보았기에 얼굴에 광채가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가운데 서 계신 주님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제자들은 두려워서 골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홀연히 오시어 그들 가운데 서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도망자의 모습, 패배자의 비굴함, 떳떳하지 못한 뒷골목 인생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의 한숨 가운데, 걱정 한 복판에, 절망 가운데 서 계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록도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들이 살아계신 주님과 여러 시간 함께 걸어가면서도 주님과 동행을 식별치 못할 정도로 회의와 공포 속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 가운데 계시고, 우리 곁에서 동행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신의학자 헤리스(Tom Harris) 박사는 그의 명저 「나도 오케이고 너도 오케」(I'm o. k, you're o. k)에서 인간이란 그 천성이 변하기 싫어하는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세 경우에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첫째 현재의 상황이 너무 괴로울 때 둘째 소망이 안보일 때 셋째로 “유레카 상황”(Eure’ka Stage)에서 인간은 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유레카란 헬라어인데 깨달음을 뜻합니다. 영어에서는 알았다. 혹은 되었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말은 갑자기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 때 쓰는 용어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와 베드로의 깨달음이 바로 유레카에 속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인간은 갑자기 깨닫게 되며 자기를 인식하고 변화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본문에서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기쁨이 충만하나이다”(28절) 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우리 곁에 부활의 주님이 계실 때 기쁨이 충만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 앞에, 여러분 건너편에, 여러분 가운데 계심을 믿고 만나고 체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 삶의 모습이 확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주님은 내 앞에 계십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는 대중 앞에서 처음 설교를 하면서 시편16편을 인용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 내용이 본문 사도행전 2:22-29절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다윗임금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25절)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웠음이여.....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베드로는 주님이 자기 옆에 계시며, 자기 우편에 계시므로 요동치 않는 생활을 하며 마음이 기쁘고 육체는 희망에 넘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내 뒤에 젖혀 놓을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모실 때 요동치 않고 기쁨에 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밤길을 갈 때도 내가 앞서면 귀신이 금방 끌어당기는 것 같고 얼마나 몸이 오싹 오싹 무서운 기가 드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앞세우고 그 위에 따라가면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나를 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주님을 앞장세울 때 기쁨이 넘치고 소망이 싹틉니다. 우리는 부활절이 지나 가버렸다고 부활하신 주님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역사(歷史)속에 파묻혀 버리면 안 됩니다. 오늘도 내일의 빛으로 주님을 내 앞에 모셔야 합니다. 내 뜻에 주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내 앞에 모시고 따라갈 때 안전하고 기쁘고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안에 사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살며 이웃 안에 사는 자를 뜻한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이웃 안에 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루터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 자유와 기쁨은 예수를 내 뒤에 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 즉 모든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주님을 앞장세우는 것이 그 근본적 태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연주자는 자기를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곡을 만든 작곡가의 뜻을 최대한도록 잘 해석하고 표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북을 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북을 치는 사람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을 내 앞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성전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뒷세우고 왔기에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사흘이나 헛고생 했듯이 우리 크리스챤들이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교회는 출석하나 예수님을 뒷세우고 살면 얼마든지 헛수고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을 기독교인에 대한 결정적인 정의로 주장했습니다. 사영리에 보면 의자의 주인인 주님을 밀어내 버리고 자기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폴틸리는 진정한 신앙이란 “moving outside myself" (자기의 상자 밖으로 나가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삶이 곧 예수님 중심의 삶이요, 예수님을 내 앞에 모시는 구체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2. 주님은 벌써 건너편에 와 계셨습니다
다시 고기잡이로 나섰다는 제자들의 모습은 허망하고 비참한 인간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참혹한 처형을 바로 며칠 전에 목격한 그들에게는 불안과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은 그들에게 당황과 회의를 품게 했습니다. 낡은 옛 직업인 고기잡이로 3년 만에 돌아온 그들은 그 동안에 잠시나마 품었던 꿈과 이상이 붕괴되고 허무한 옛 모습을 발견한 좌절 속에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밤새도록 고기가 한 마리도 안 잡혔다는 현실은 그들을 우울하게 하고 짜증나게 하였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빈 배속에 올라앉아 아침을 맞이하는 상황은 한마디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때 바로 눈앞에 바다가 언덕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실패를 거듭한 베드로가 자기를 파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막연한 예수, 죽은 예수, 부활했다는 소문의 예수, 남들의 예수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 바로 눈앞에 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 이미 건너편에 미리 와 계신 주님은 소망과 해결과 구원자로서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체험을 설교로 외친 것입니다. “나를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내 우편에 계시도다”(25절) 성경에서 우편이란 우리를 지켜 주시는 구원이신 하나님을 가리킬 때의 위치입니다. 옛날 무사는 방패를 왼손에 잡았기 때문에 좌편은 방어가 잘 되었지만 적의 공격에 위험하고 약한 곳이 오른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오른편에 계신다고 하는 말씀은 우리의 약점과 부족한 점과 허물과 단점을 보충하시며 나의 약함을 지켜주시는 주님을 뜻합니다. 약점과 죄를 뻔히 보시며 나를 문제의 수렁에서 인도해 내시기 위하여 대기하고 계시는 주님을 말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너무나 먼 다리」「가장 길었던 날」등 대작을 쓴 문학가 코넬리어스 라이안 (cornelus ryan)은 5년간 암과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그 투병 기록을 부인이 책으로 엮은 것이 「가장 긴밤」(The longest night)인데 그녀는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남편은 아침마다 일어나면 똑 같은 기도를 반복했습니다. 하나님 또 하루 좋은 날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는 짧은 기도였습니다.
남편은 자기가 암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었을 터인데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때 남편은 평소에 생각 해 두었던 기쁨의 다섯 가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①아내를 또 볼 수 있기 때문이요 ②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요 ③병들어 눕기 전에 가장 길었던 날을 탈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요
④병과 싸울 의지의 힘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⑤주님은 언제나 자기 곁에(침상곁)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랍니다.
과연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으나 살아계신 예수,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의 건너편, 고통의 건너편에 서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테반은 돌에 맞아 순교 당하면서도 저 건너편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주님을 보았기에 얼굴에 광채가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가운데 서 계신 주님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제자들은 두려워서 골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홀연히 오시어 그들 가운데 서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도망자의 모습, 패배자의 비굴함, 떳떳하지 못한 뒷골목 인생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의 한숨 가운데, 걱정 한 복판에, 절망 가운데 서 계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록도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들이 살아계신 주님과 여러 시간 함께 걸어가면서도 주님과 동행을 식별치 못할 정도로 회의와 공포 속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 가운데 계시고, 우리 곁에서 동행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신의학자 헤리스(Tom Harris) 박사는 그의 명저 「나도 오케이고 너도 오케」(I'm o. k, you're o. k)에서 인간이란 그 천성이 변하기 싫어하는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세 경우에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첫째 현재의 상황이 너무 괴로울 때 둘째 소망이 안보일 때 셋째로 “유레카 상황”(Eure’ka Stage)에서 인간은 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유레카란 헬라어인데 깨달음을 뜻합니다. 영어에서는 알았다. 혹은 되었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말은 갑자기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 때 쓰는 용어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와 베드로의 깨달음이 바로 유레카에 속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인간은 갑자기 깨닫게 되며 자기를 인식하고 변화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본문에서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기쁨이 충만하나이다”(28절) 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우리 곁에 부활의 주님이 계실 때 기쁨이 충만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 앞에, 여러분 건너편에, 여러분 가운데 계심을 믿고 만나고 체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 삶의 모습이 확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