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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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성안에 거주하던 여리고 사람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할 때(6:21) 유독 여리고 성벽위에 살던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들은 구원받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기생 라합의 가족만 살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구원해 주겠다는 증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붉은 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이 내려다보이는 싯딤에 왔을 때 정탐꾼 두 사람을 보내어 여리고의 형편을 미리 엿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고 있을 때 여리고에 비상령이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정탐꾼 2명이 침투했다는 첩보가 들어와 성어구에 사는 기생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정탐꾼들이 성문을 통과할 것인데 발견 즉시 연락해야 한다는 경계 명령을 했습니다.
당시 여리고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과는 복장이 달랐기 때문에 금방 육안으로 식별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정탐꾼들은 바로 그 시간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하고 있었습니다.
귀뜸만 하면 즉시 검거되고 기생 라합은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기생 라합은 어떠했습니까? 오히려 그들을 데리고 지붕위로 올라가 삼대 밑에 숨겼습니다. 실로 목숨을 건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발각되면 정탐꾼들은 물론 라합의 일문(一門)은 몰사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모험을 한 것이었습니까? 기생 라합은 멀리 내다보았습니다. 당장 눈앞의 일만 생각하면 팔자가 늘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 술장사 걷어치우고 떵떵 거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생라합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홍해 물을 마르게 했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는 아모리 왕들을 전멸시키게 했다는 소문이 여리고에 파다하게 돌고 있었습니다. 기생 라합은 그러한 소문들을 단지 소문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불문하고 이번 여리고와 이스라엘의 전쟁도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이 필연적으로 승리하게 된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녀의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살려 보내주면서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해 줄 것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정탐꾼들이 제시한 증표가 바로 붉은 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 6장에 보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정복할 때 여호수아 장군은 창문에 붉은 줄이 내려진 기생 라합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건드리지 말고 구원해 줄 것을 군대에 명령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그러한 것입니다. 멀리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현실을 바로 판단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내건 모험을 하여야 합니다. 당장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약속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1. 창에 드리운 붉은 줄은 바로 기생 라합의 신앙고백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게 하신 능력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이땅도 분명히 정복하신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추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친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졌기에 그녀와 그 가족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고 신약성경 야고보서2:25절에 라합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라고 칭송했습니다. 라합이 창문에 붉은 줄을 내려뜨린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은 반드시 승리하고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받게 된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진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너희 믿음을 나타내 보이라”고 요청하는 시대입니다. 믿음은 말을 통해서 보일 수 없고 행위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우리 용해동교회는 우리의 믿음을 사랑과 친절과 봉사와 희생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룩한 모든 일들이 붉은 줄인 것을 믿습니다.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청계에 엘림 수양관을 마련하여 다른 교회들과 함께 수련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로원을 세워 노인들을 돌보아주고 있지 않습니까? 또 교회 내에서는 어린이집을 통하여 차세대 인물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엘림 지역아동센터는 이 지역 아동들을 모아 신앙교육과 원어민 영어공부 및 학습지도를 하며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하는 모습들이 곧 우리 용해동 교회가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이 믿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행위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추상적인 논리가 아닙니다. 믿음대로 행하는 종교입니다. 그때에 힘이 생기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생라합이 믿음으로 붉은 줄을 내린 것이 바로 그녀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믿음의 행위로 증거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주는 부활주일이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 이제 우리의 믿음을 사랑과 봉사와 자비와 희생의 행위를 통하여 증거 해 보입시다.
2. 붉은 줄을 창에 드리운 것은 라합에게 있어서 희망과 승리의 증표입니다
여리고가 멸망당해도 창가에 드리운 붉은 줄은 자신은 구원받는다는 희망의 표식이요, 승리의 암호였습니다. 영국의 사상가 루이스(C. S. Lewis)는 “이 세상을 위하여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은 내세를 희망하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6.25당시 공산군이 대구까지 점령했을 때 북한에 남아있던 기독교인들은 방공호에 숨어 언젠가는 국군과 UN군이 해방시켜 줄 것을 믿고 열심히 태극기를 만들며 환영준비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들은 결국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진할 때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최후의 승리를 믿는 위대한 희망을 가지고 사는 까닭에 오늘 위대한 일을 해 낼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유명한 바이올린 리스트가 훌륭한 곡을 연주하고 나서 그 바이올린을 내던져 부셔버렸습니다. 모든 청중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잠시 후 다른 바이올린을 가지고 나와 똑같은 곡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하기를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연주한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사람이 만든 훌륭한 바이올린입니다. 그러나 명연주라는 것은 악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능력과 영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승리와 성공은 여러분이 어떤 재물이나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을 믿고 믿음대로 창가에 붉은 줄을 내렸더니 믿음대로 구원받은 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생 라합을 단지 생명을 살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다윗임금의 고조(高祖)할머니가 되었으며(마1:5) 그 족보에서 구세주 예수그리스도가 나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라합이 창가에 내린 붉은 줄은 분명히 희망과 승리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라합처럼 마음의 창가에 붉은 줄을 내리십시다. 희망과 승리의 증표를 가지고 힘 있고 당당하게 사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3. 이 붉은 줄은 곧 구원의 증표입니다
여호수아서 6:25절에 보면 언약대로 라합과 그 가족이 다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붉은 줄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모세가 출애굽하기 위하여 바로와 대결할 때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이적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맨 마지막에 나타난 이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라고 했습니다. 문설주에 피가 묻어 있지 않은 애굽 사람들의 집에는 맏아들이 죽는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의 가정에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꾸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느냐? 고 보챘습니다. 발랐다고 해도 자꾸 보채니까 다시 한번 나가 보았더니 청소부가 깨끗이 닦아 버렸더랍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양을 잡아 막 피를 바르고 나니 이곳저곳 애굽인들의 집에서 맏아들이 죽어 우는 소리가 구슬피 들렸다고 합니다. 성령님이 아이를 통해 역사하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붉은 줄은 바로 구원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는 곧 구원의 보혈입니다. 히브리서 9:22절에 보면 “율법을 쫓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는 죄 없으신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 받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구속의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생 라합이 창가에 내려뜨린 그 붉은 줄은 바로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구원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기생라합은 붉은 줄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다윗임금과 예수님의 계보에 이름이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속의 은총입니다. 이제까지는 여리고 사람이었고, 남자들을 홀리고 술을 팔던 기생이었지만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고 행위로 증거를 보였을 때 그의 모든 죄는 사해졌으며 구원받고 하나님의 족보에까지 편입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가 어떠한 실수와 잘못과 죄를 범했을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 때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주일을 보낸 우리에게 부활의 확신과 소망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합처럼 여러분의 마음의 창가에 붉은 줄을 내 거시기 바랍니다.
출애굽당시 유다 사람들의 집 문설주에 발라졌던 그 양의 피가 여러분의 마음의 문설주에 발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바로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고 구원받게 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라합처럼 여러분도 믿고 그 라합처럼 행위로 믿음을 증거 해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구원받은 크리스챤의 증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기생 라합의 가족만 살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구원해 주겠다는 증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붉은 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이 내려다보이는 싯딤에 왔을 때 정탐꾼 두 사람을 보내어 여리고의 형편을 미리 엿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고 있을 때 여리고에 비상령이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정탐꾼 2명이 침투했다는 첩보가 들어와 성어구에 사는 기생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정탐꾼들이 성문을 통과할 것인데 발견 즉시 연락해야 한다는 경계 명령을 했습니다.
당시 여리고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과는 복장이 달랐기 때문에 금방 육안으로 식별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정탐꾼들은 바로 그 시간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하고 있었습니다.
귀뜸만 하면 즉시 검거되고 기생 라합은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기생 라합은 어떠했습니까? 오히려 그들을 데리고 지붕위로 올라가 삼대 밑에 숨겼습니다. 실로 목숨을 건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발각되면 정탐꾼들은 물론 라합의 일문(一門)은 몰사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모험을 한 것이었습니까? 기생 라합은 멀리 내다보았습니다. 당장 눈앞의 일만 생각하면 팔자가 늘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 술장사 걷어치우고 떵떵 거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생라합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홍해 물을 마르게 했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는 아모리 왕들을 전멸시키게 했다는 소문이 여리고에 파다하게 돌고 있었습니다. 기생 라합은 그러한 소문들을 단지 소문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불문하고 이번 여리고와 이스라엘의 전쟁도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이 필연적으로 승리하게 된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녀의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살려 보내주면서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해 줄 것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정탐꾼들이 제시한 증표가 바로 붉은 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 6장에 보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정복할 때 여호수아 장군은 창문에 붉은 줄이 내려진 기생 라합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건드리지 말고 구원해 줄 것을 군대에 명령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그러한 것입니다. 멀리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현실을 바로 판단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내건 모험을 하여야 합니다. 당장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약속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1. 창에 드리운 붉은 줄은 바로 기생 라합의 신앙고백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게 하신 능력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이땅도 분명히 정복하신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추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친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졌기에 그녀와 그 가족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고 신약성경 야고보서2:25절에 라합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라고 칭송했습니다. 라합이 창문에 붉은 줄을 내려뜨린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은 반드시 승리하고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받게 된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진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너희 믿음을 나타내 보이라”고 요청하는 시대입니다. 믿음은 말을 통해서 보일 수 없고 행위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우리 용해동교회는 우리의 믿음을 사랑과 친절과 봉사와 희생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룩한 모든 일들이 붉은 줄인 것을 믿습니다.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청계에 엘림 수양관을 마련하여 다른 교회들과 함께 수련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로원을 세워 노인들을 돌보아주고 있지 않습니까? 또 교회 내에서는 어린이집을 통하여 차세대 인물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엘림 지역아동센터는 이 지역 아동들을 모아 신앙교육과 원어민 영어공부 및 학습지도를 하며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하는 모습들이 곧 우리 용해동 교회가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이 믿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행위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추상적인 논리가 아닙니다. 믿음대로 행하는 종교입니다. 그때에 힘이 생기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생라합이 믿음으로 붉은 줄을 내린 것이 바로 그녀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믿음의 행위로 증거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주는 부활주일이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 이제 우리의 믿음을 사랑과 봉사와 자비와 희생의 행위를 통하여 증거 해 보입시다.
2. 붉은 줄을 창에 드리운 것은 라합에게 있어서 희망과 승리의 증표입니다
여리고가 멸망당해도 창가에 드리운 붉은 줄은 자신은 구원받는다는 희망의 표식이요, 승리의 암호였습니다. 영국의 사상가 루이스(C. S. Lewis)는 “이 세상을 위하여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은 내세를 희망하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6.25당시 공산군이 대구까지 점령했을 때 북한에 남아있던 기독교인들은 방공호에 숨어 언젠가는 국군과 UN군이 해방시켜 줄 것을 믿고 열심히 태극기를 만들며 환영준비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들은 결국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진할 때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최후의 승리를 믿는 위대한 희망을 가지고 사는 까닭에 오늘 위대한 일을 해 낼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유명한 바이올린 리스트가 훌륭한 곡을 연주하고 나서 그 바이올린을 내던져 부셔버렸습니다. 모든 청중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잠시 후 다른 바이올린을 가지고 나와 똑같은 곡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하기를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연주한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사람이 만든 훌륭한 바이올린입니다. 그러나 명연주라는 것은 악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능력과 영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승리와 성공은 여러분이 어떤 재물이나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을 믿고 믿음대로 창가에 붉은 줄을 내렸더니 믿음대로 구원받은 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생 라합을 단지 생명을 살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다윗임금의 고조(高祖)할머니가 되었으며(마1:5) 그 족보에서 구세주 예수그리스도가 나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라합이 창가에 내린 붉은 줄은 분명히 희망과 승리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라합처럼 마음의 창가에 붉은 줄을 내리십시다. 희망과 승리의 증표를 가지고 힘 있고 당당하게 사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3. 이 붉은 줄은 곧 구원의 증표입니다
여호수아서 6:25절에 보면 언약대로 라합과 그 가족이 다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붉은 줄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모세가 출애굽하기 위하여 바로와 대결할 때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이적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맨 마지막에 나타난 이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라고 했습니다. 문설주에 피가 묻어 있지 않은 애굽 사람들의 집에는 맏아들이 죽는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의 가정에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꾸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느냐? 고 보챘습니다. 발랐다고 해도 자꾸 보채니까 다시 한번 나가 보았더니 청소부가 깨끗이 닦아 버렸더랍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양을 잡아 막 피를 바르고 나니 이곳저곳 애굽인들의 집에서 맏아들이 죽어 우는 소리가 구슬피 들렸다고 합니다. 성령님이 아이를 통해 역사하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붉은 줄은 바로 구원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는 곧 구원의 보혈입니다. 히브리서 9:22절에 보면 “율법을 쫓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는 죄 없으신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 받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구속의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생 라합이 창가에 내려뜨린 그 붉은 줄은 바로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구원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기생라합은 붉은 줄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다윗임금과 예수님의 계보에 이름이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속의 은총입니다. 이제까지는 여리고 사람이었고, 남자들을 홀리고 술을 팔던 기생이었지만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고 행위로 증거를 보였을 때 그의 모든 죄는 사해졌으며 구원받고 하나님의 족보에까지 편입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가 어떠한 실수와 잘못과 죄를 범했을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 때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주일을 보낸 우리에게 부활의 확신과 소망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합처럼 여러분의 마음의 창가에 붉은 줄을 내 거시기 바랍니다.
출애굽당시 유다 사람들의 집 문설주에 발라졌던 그 양의 피가 여러분의 마음의 문설주에 발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바로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고 구원받게 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라합처럼 여러분도 믿고 그 라합처럼 행위로 믿음을 증거 해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구원받은 크리스챤의 증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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