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선택(사순절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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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한 평생을 살며 자신과의 큰 싸움을 몇 번은 치루어야 합니다. 크리스챤이라면 사탄과의 흥정을 몇 번쯤은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하여 반드시 밀어닥치는 이 흥정에서 패배하느냐? 성공하느냐? 에 따라 크리스챤의 진가가 결정됩니다.
예수님도 적어도 세 번에 걸친 엄청난 흥정을 치루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광야에서의 대 흥정입니다.(마4:1-11)
(1) 예수님께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천국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공생애의 첫발을 내 딛을 때 광야에 나가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고 나올 때 종교적 문제를 놓고 사탄으로부터 대흥정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실로 예수님에게 앞날의 성패를 가름하는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은근 슬쩍 다가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띄어주면서 배고픈 예수에게 생각하는 것처럼 이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어 먹으라고 속삭였습니다. 이것은 빵을 택할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냐? 를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40일을 금식했으니 사람의 머리만 보아도 수박덩이로 보이고, 돌만 보아도 떡덩이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군침이 도는데 마귀는 그러한 약점을 노리고 수작을 부린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의 약점을 노리며 접근한다는 것을 아시고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때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흔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택했으며 굶주린 현실에 굴복하여 빵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2) 두 번째로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몸이 상하지 않는 기적을 군중들에게 보여주어 능력을 과시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영광보다는 자기 영광을 내 세우려는 오만방자함입니다. 자기의 힘, 능력, 학식, 재주, 재력 등으로 자기를 과시하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헤롯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사는 것이며 인간의 공로에 의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은혜의 생활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흥정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3) 세 번째는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천하 모든 것이 제 것인 양 우쭐 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을 어찌 제 맘대로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사탄의 이 대흥정은 자기에게 굴복할 것이냐?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냐를 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짧은 한 생애를 살면서 “누구의 종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분명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내가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선택해야 합니다. 사탄의 종이 되어 욕심과 이기적 인생관과 파괴적이며 어두움에 속한 노예가 될 것인지 주님의 종이 되어 사랑과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빛의 자녀가 될 것인지 분명한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탄과의 흥정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선택했습니다. 그때 마귀는 예수님을 떠났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순절에 예수님의 행적을 깊이 묵상합시다. 여러분은 영과 육의 싸움에서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흑암입니까? 빛입니까? 죽음입니까? 영생입니까? 에서처럼 배가 고프다고 낼름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직분을 팔고 자신 뿐 아니라 후손까지 땅을 치는 패배를 맛보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맙시다. 진리를 쫓아 영원을 지향하는 꿈과 비전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 가이사랴 빌립보의 흥정입니다.(막8:31-37)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지방 빕립보를 여행하고 있을 때 처음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했습니다.(31절) 그때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에 솟았고 수많은 군중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반대자들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놀라서 예수님을 왈칵 껴안으며 그런 일은 결코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생각하는 베드로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의 생각에는 이대로 나가면 예수님은 인심도 얻고 권력도 잡아 무난히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갑자기 베드로에게 “사탄안 내 뒤로 물러가라” 호통 치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와의 싸움이 아니라 베드로를 이용한 사탄의 계교였던 것입니다. 33절에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한 것은 사탄이 하나님 보다는 사람의 일을 택하도록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던지는 시험입니다. “나만을 위하여 살 것인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 것인가?” “나 자신의 노예가 될 것인가? 주님의 종이 될 것인가?” 하는 심각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36절에 보면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목숨은 긴 것 같으나 순간적이요,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짧은 것 같으나 영원한 생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순간보다는 영원을 택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6절에는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는데 천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구 전체가 여러분 것이라고 해도 죽어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등기를 100번 해 놓은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 분명히 결정하십시오. 세상을 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택하시겠습니까? 항상 예수님처럼 사람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골고다의 대 흥정을 생각 해 봅시다(마27:39-50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쏟고 계실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비웃으며 소리쳤습니다.(40절) 마27:42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또 희롱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올 지어다” 또 44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까지 이와 같이 욕했다고 했습니다. 이 음성이야 말로 사탄이 최후로 걸어오는 유혹이요 대흥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①자기를 구원할 것인가? 인류를 구원할 것인가?
목숨을 유지할 것인가? 복음을 성취할 것인가? 를 선택하게 하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내가 살고 볼 것인가? 기어코 참아서 죽음으로 믿는자들의 생명을 구원할 것인가? "To be or not to be" 실로 심각한 파우스트적인 선택의 기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문호 괴테의 명작 중에 파우스트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사탄의 대 흥정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사탄과 엄청난 흥정을 합니다. 앞으로 24년간 모든 부귀와 영화를 사탄으로부터 받을 것을 약속 받습니다. 그러나 24년이 지나면 그의 생명을 사탄이 거두어 가겠다는 흥정이었습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얼른 이 흥정을 받아들였고 그 약속대로 24년간 부를 누리며 영화를 누리고 삽디다.
그러나 24년은 잠간 지나가 버리고 사탄은 그 부하 메피스토페레스를 파우스트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오늘밤 12시부터 1시 사이에 네 영혼을 데려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작품은 마지막 장면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파우스트의 집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우립니다. 그 소리는 마치 뱀이 그 집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러자 집안에서 파우스트 박사의 “살려달라, 살려달라”는 비명이 들려오고 그 비명은 차차 잦아들며 막이 내리는 줄거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과의 흥정에서 패배한 인간은 그런 희곡의 주인공이 됩니다.
정말 무엇이 행복이며 축복인 생애인가? 나의 생애를 건 대 흥정에서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계약을 버리고 사탄과 흥정하는 이야기입니다. 잘못된 선택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고 행복과 평화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과의 흥정을 끊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따랐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선택하신 위대한 흥정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는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확실한 신앙 노선이 정립되어야 하겠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택하지 않고 강도를 택했던 빌라도가 되지 맙시다.
더 이상 사탄과 흥정한 아담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과감히 사탄과의 흥정을 끊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쫓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하여 반드시 밀어닥치는 이 흥정에서 패배하느냐? 성공하느냐? 에 따라 크리스챤의 진가가 결정됩니다.
예수님도 적어도 세 번에 걸친 엄청난 흥정을 치루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광야에서의 대 흥정입니다.(마4:1-11)
(1) 예수님께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천국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공생애의 첫발을 내 딛을 때 광야에 나가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고 나올 때 종교적 문제를 놓고 사탄으로부터 대흥정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실로 예수님에게 앞날의 성패를 가름하는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은근 슬쩍 다가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띄어주면서 배고픈 예수에게 생각하는 것처럼 이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어 먹으라고 속삭였습니다. 이것은 빵을 택할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냐? 를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40일을 금식했으니 사람의 머리만 보아도 수박덩이로 보이고, 돌만 보아도 떡덩이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군침이 도는데 마귀는 그러한 약점을 노리고 수작을 부린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의 약점을 노리며 접근한다는 것을 아시고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때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흔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택했으며 굶주린 현실에 굴복하여 빵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2) 두 번째로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몸이 상하지 않는 기적을 군중들에게 보여주어 능력을 과시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영광보다는 자기 영광을 내 세우려는 오만방자함입니다. 자기의 힘, 능력, 학식, 재주, 재력 등으로 자기를 과시하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헤롯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사는 것이며 인간의 공로에 의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은혜의 생활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흥정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3) 세 번째는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천하 모든 것이 제 것인 양 우쭐 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을 어찌 제 맘대로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사탄의 이 대흥정은 자기에게 굴복할 것이냐?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냐를 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짧은 한 생애를 살면서 “누구의 종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분명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내가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선택해야 합니다. 사탄의 종이 되어 욕심과 이기적 인생관과 파괴적이며 어두움에 속한 노예가 될 것인지 주님의 종이 되어 사랑과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빛의 자녀가 될 것인지 분명한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탄과의 흥정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선택했습니다. 그때 마귀는 예수님을 떠났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순절에 예수님의 행적을 깊이 묵상합시다. 여러분은 영과 육의 싸움에서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흑암입니까? 빛입니까? 죽음입니까? 영생입니까? 에서처럼 배가 고프다고 낼름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직분을 팔고 자신 뿐 아니라 후손까지 땅을 치는 패배를 맛보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맙시다. 진리를 쫓아 영원을 지향하는 꿈과 비전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 가이사랴 빌립보의 흥정입니다.(막8:31-37)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지방 빕립보를 여행하고 있을 때 처음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했습니다.(31절) 그때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에 솟았고 수많은 군중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반대자들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놀라서 예수님을 왈칵 껴안으며 그런 일은 결코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생각하는 베드로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의 생각에는 이대로 나가면 예수님은 인심도 얻고 권력도 잡아 무난히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갑자기 베드로에게 “사탄안 내 뒤로 물러가라” 호통 치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와의 싸움이 아니라 베드로를 이용한 사탄의 계교였던 것입니다. 33절에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한 것은 사탄이 하나님 보다는 사람의 일을 택하도록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던지는 시험입니다. “나만을 위하여 살 것인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 것인가?” “나 자신의 노예가 될 것인가? 주님의 종이 될 것인가?” 하는 심각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36절에 보면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목숨은 긴 것 같으나 순간적이요,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짧은 것 같으나 영원한 생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순간보다는 영원을 택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6절에는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는데 천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구 전체가 여러분 것이라고 해도 죽어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등기를 100번 해 놓은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 분명히 결정하십시오. 세상을 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택하시겠습니까? 항상 예수님처럼 사람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골고다의 대 흥정을 생각 해 봅시다(마27:39-50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쏟고 계실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비웃으며 소리쳤습니다.(40절) 마27:42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또 희롱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올 지어다” 또 44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까지 이와 같이 욕했다고 했습니다. 이 음성이야 말로 사탄이 최후로 걸어오는 유혹이요 대흥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①자기를 구원할 것인가? 인류를 구원할 것인가?
목숨을 유지할 것인가? 복음을 성취할 것인가? 를 선택하게 하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내가 살고 볼 것인가? 기어코 참아서 죽음으로 믿는자들의 생명을 구원할 것인가? "To be or not to be" 실로 심각한 파우스트적인 선택의 기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문호 괴테의 명작 중에 파우스트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사탄의 대 흥정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사탄과 엄청난 흥정을 합니다. 앞으로 24년간 모든 부귀와 영화를 사탄으로부터 받을 것을 약속 받습니다. 그러나 24년이 지나면 그의 생명을 사탄이 거두어 가겠다는 흥정이었습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얼른 이 흥정을 받아들였고 그 약속대로 24년간 부를 누리며 영화를 누리고 삽디다.
그러나 24년은 잠간 지나가 버리고 사탄은 그 부하 메피스토페레스를 파우스트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오늘밤 12시부터 1시 사이에 네 영혼을 데려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작품은 마지막 장면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파우스트의 집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우립니다. 그 소리는 마치 뱀이 그 집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러자 집안에서 파우스트 박사의 “살려달라, 살려달라”는 비명이 들려오고 그 비명은 차차 잦아들며 막이 내리는 줄거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과의 흥정에서 패배한 인간은 그런 희곡의 주인공이 됩니다.
정말 무엇이 행복이며 축복인 생애인가? 나의 생애를 건 대 흥정에서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계약을 버리고 사탄과 흥정하는 이야기입니다. 잘못된 선택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고 행복과 평화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과의 흥정을 끊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따랐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선택하신 위대한 흥정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는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확실한 신앙 노선이 정립되어야 하겠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택하지 않고 강도를 택했던 빌라도가 되지 맙시다.
더 이상 사탄과 흥정한 아담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과감히 사탄과의 흥정을 끊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쫓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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