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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야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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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207회 작성일 21-03-14 10:07

본문

출애굽기 16: 3


1. 결핍과 시험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엘림에서 생수로 목을 축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내 다시 원망하고 맙니다.
이번에는 물이 아니라 식량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며칠 동안 굶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굶어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은 있었지만 실상 굶어서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3주 내지 4주동안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우리 몸의 각종 장기들이 다발적으로 이상을 일으켜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굶주림은 결코 3-4주 이상 지속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굶주림이 심각은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죽음의 한계까지 도달했다면 그들은 최후의 수단을 활용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들의 가축입니다.

다음 장 17장에 보면

17: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후 르비딤에서 물이 없다고 또다시 원망할 때 목말라하는 자신들의 가축을 언급했습니다.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축을 소유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본 장의 그들의 굶주림은 죽음의 경계와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는 명확한 사실입니다.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주림의 한계에 이르렀었다면 그들의 가축은 식량으로 쓰여 살아 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정황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을만큼 배가 고팠지만 실상 배고파서 죽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고, 최후의 비상 식량이 되어줄 그들의 가축들도 아직은 멀쩡히 살아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 장의 이스라엘의 배고픔의 강도와 단계를 면밀히 살펴 본 이유가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 물 사건을 통해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이유로든 원망하지 말라고 율법과 규례를 세우셨습니다.

그들이 지켜야 할 율법과 규례는 단 하나, 하나님을 믿고 제발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또 다시 원망을 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율법과 규례를 어기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너무나 굶주려서 죽기 직전에 하나님을 원망했었더라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원망을 죄로 여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배가 고프다고 원망을 할 때 정말 그들은 배가 고파서 죽어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단 한명도 배가 고파서 죽지 않았으며, 그들의 가축들도 멀쩡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망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결론입니다.

믿음의 싸움에서 항복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2. 그들은 왜 참지 못했을까?

배가 고파서 죽게 되었을 때 최후의 한마디로 하나님을 원망했더라면 그것은 참작의 사유가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을 수 있는 상황에서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언제 원망합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더 낫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수없이 많은 이유들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원망해왔습니다.

특히 나와 가까운 사람들, 나를 의지하는 사람들, 나의 가족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그간의 우리의 원망은 어떤 이유로든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원망합니까?

본문에 답이 나와있습니다.

"죽을 거 같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고픔에 시달렸지만 아직 죽음의 단계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을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곧 굶어 죽을것이라고 속단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먼저 그들은 도저히 먹을 거리를 구할 수 없는 앞으로의 여정을 감안했습니다.

그들이 행진하던 곳은 곡창지대나 과수원이 아니라 메마른 사막 광야길이었습니다.

먹을 거리를 구할 수 있는 장소까지 살아서 갈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250만명을 넘는 대규모 집단이었습니다.

아무리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실지라도 메마른 신광야 사막 한가운데서 250만명의 입에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시는 것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될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지극히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에 의하면 그들은 별 수 없이 광야 사막에서 굶어죽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얻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을 생각해봅시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였던 빌립은 오천명의 최소 생존 조건인 이백 데나리온을 계산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 계산대로라면 오천명의 군중들은, 아니 여인들과 아이들을 합쳐 최소 만이천명의 군중들은 배고파 죽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될 거 같냐고 물어보세요.

결국엔 그 대답은 모두 같을 것입니다.

앞으로 잘되든 못되든 잘나가든 못나가든 결국엔 다 죽을 것입니다.

늙어 죽거나 다쳐서 죽거나 배고파 죽거나 얼어 죽거나 더워 죽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다 죽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다 '죽게 되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냉철하고 이성적인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결국엔 죽게 되는구나' 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합니다.

죽게 되었는데 거기에 무슨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겠습니까?

원망 밖에 남지 않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 있을 때만큼은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야 하겠지만 이것도 말이 안되는게 결국엔 죽는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뼈 속까지 기쁘고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듯 '결국엔 죽게 되는 구나' 라는 생각은 작은 어려움도 크게 보이게 합니다.

며칠만 굶주려도 '배고파 죽게 되는구나' 라고 속단하고 말게 됩니다.

죽음의 공포는 이러한 원망 뿐만 아니라 다른 죄도 야기합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사람들은 난민 대피소로 피신 했습니다.

놀랍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난데없는 성폭행 사건들이 발생했습니다.

당장의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기위해 사람들은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순간의 쾌락에 집착하게됩니다.

죽음의 공포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대 적은 바로 죽음의 공포인 것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 이 우리로 하여금 너무나 쉽게 원망하게하고 너무나 허무한 단기적인 쾌락에 집착하게 하며 너무나 허무한 가치를 위해 자신을 파괴시키고 맙니다.

 
3. 죽음의 대안

그러나 죽음은 우리의 숙명이 아닙니다.

죽음만이 우리의 유일한 끝이 아닙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집트 노예로 살다가 죽는 것이 당연한 숙명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은 죽음 대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죽음의 노예에서 생명의 자유인으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죽지 않기 위해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가치있고 의미있게 죽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지금껏 우리를 수많은 위험과 어려움에서 구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결론)

1. 죽기 직전까지는 원망하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의 노예로부터 생명의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열가지 재앙도, 홍해 사건도, 마라의 쓴 물 사건도 다 잊어버리고 배고파 죽을 것 같다고 원망합니다.

아직도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 무장해제된 줄도 모르고뻔뻔하게 우리에게 주인 노릇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조금만 배가 고파도 조금만 목말라도 죽을 것 같다고 원망합니까?

우리는 무엇인가 부족할 때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특히 물과 식량 같은 생존의 필수 요소둘이 부족할 경우 우리는 즉시 죽음의 공포에 다시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목말라 죽을 것 같고 배고파 죽을 것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목말라 죽은 사람이 없었고 배고파 죽은 사람이 없었던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당장 부족할 뿐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핍을 겪게하시지만 이는 우리를 죽이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핍을 통해 감사를 배우고 타인의 고통과 처지를 체험하고 믿음을 더욱 굳게하는 등의 필수과목을 이수하게 하십니다.

'결핍' 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마십시오.

오히려 '결핍'에 적응하려고 시도하십시오.

'결핍' 별거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죽기까지 내버려 두시않으십니다.

조금의 부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누리십시오.
 

2. 일용할 양식에 자족합시다.

:19-20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만나는 히브리어로 "이게 뭐지?"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난생 처음 보는 것으로 생긴 것은 깟씨 같다고 합니다.
깟씨는 코리엔더, 즉 고수씨앗처럼 작음을 의미합니다.

250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도 남을 양이니 최소한 1톤차로 오천대분량으로서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엄청난 양이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만나의 양은 개인당 한 오멜, 약 2.2 리터 분량입니다.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만나를 비축함으로써 차후 만약에 발생할 '결핍'에 대책을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당 2.2리터 이보다 더 가져가 남기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백세시대니 백오십시대니 하면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대책을 강구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대책을 구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비축해 놓아도 썩어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만 날 뿐입니다.

대신 하나님의 나라에 저축하십시오.

어려운 이웃에게 양보하고 아량을 베풀며 구제에 힘쓰십시오.

반드시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3. 행복하려고 행복하세요.

:26-27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만나 한 오멜을 거두는 것은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작은 씨앗을 2.2리터에 모래와 흙을 걸러내어 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한 오멜을 거두는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마땅한 노동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미루거나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 자체가 하나님이 되어 경배의 대상이 되면 안됩니다.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은 나의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먼저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오늘 날의 주일을 세우시고 하루를 노동으로부터 온전히 구분하게 하셨습니다.

일하지 않는 것도 죄이지만 쉬지 않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수고로이 일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누리고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의 근원은 우리의 능력과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할 뿐이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부족한 것도 가끔이고 우리에게 유익하니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믿읍시다.

행복해서 행복한 것 아닙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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